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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 재림 전 심판, 예언의 신에 관한 질문과 답변

4. “닫힌 문”개념은 오류가 있어서 수정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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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5:10과 요한계시록 3:7에 나오는 성경적 표현으로, 밀러주의 재림신자들이 처음으로 재림 직전에 있을 은혜의 시기의 끝에 적용한 용어이다(William Miller, Evidence From Scripture and History of the Second Coming of Christ About the Year 1843: Exhibited in a Course of Lectures [Troy, NY: Kemble & Hooper, 1836], 97, 98).

1844년 10월에 밤중소리 선포가 있은 후 밀러주의 재림신자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이들 가운데 더 큰 무리는 은혜의 시기 끝으로 보는 닫힌 문 개념과 1844년이라는 연대의 의미를 모두 버렸다. 이들은 예수께서 오실 미래의 다른 날짜를 기대하였다. 더 작은 무리는 계속하여 1844년이라는 연대의 예언적인 중요성을 믿었다. 이 두 번째 무리가 바로 ‘닫힌 문 또는 신랑 재림신자’라고 불렸으며, 후에 안식일 준수 재림신자(Sabbatarian Adventists)라고 불린 자들이었다. 이들에게 닫힌 문 개념은 1844년의 밤중소리를 믿는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닫힌 문 개념이 대실망의 시기에 시작하여 1852년경까지 계속되었다는 점에 비추어, 이는 예수께서 세상에 대하여 은혜의 시기를 끝냈다는 단순한 믿음에서부터 예수께서 새로운 문을 여시고 하늘 성소의 지성소로 들어가셨다(세상에 안식일 기별을 선포하는 것이 요청됨)는 극적으로 다른 믿음으로 점차 발전적으로 바뀌어 갔음을 의미한다. 이런 발전적 변천의 과정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이런 이해의 진전에 나타난 엘렌 화잇의 관점과 역할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조셉 터너(Joseph Turner)와 아폴로스 해일(Apollos Hale)은 1845년 1월에 <에드벤트 미러(Advent Mirror)>라는 단행본에 ‘신랑 또는 닫힌 문’ 재림신자에 대한 기준적인 견해를 세웠다. 마태복음 25:1-13과 다니엘 7:9, 10, 13, 14을 연관시킴으로써 터너와 해일은 1844년 10월에 예수께서 하늘 혼인예식에 들어가셨고 곧이어 혼인잔치[재림]를 위해 돌아오실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의 이해에 의하면,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께서 간구자[중보자]에서 왕으로 그분의 역할을 바꾸셨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문제 있는 측면은 1844년 10월의 밤중소리가 세상에 주어진 복음의 최종적 선포였고 “죄인들” 곧 “세상의 대다수”는 더 이상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한 데 있다. 이들은 “죄인”이란 재림기별의 “진리를 거절한” 자를 말한다고 규정하면서, 그 용어를 개인적으로 그리스도께 헌신하지 않은 모든 자에게도 적용했다.

그들은 세상이 이미 경고를 받았다고 믿었지만, 은혜의 시기가 모든 자에게 닫힌 것은 아니었다고 매우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어떤 이들은 개인적으로 여전히 구원받을 수 있었고, 심지어는 밀러주의 운동 밖에 있는 자들도 빛을 멸시하지 않고 아직 “[하나님의] 자비의 지배를 받는 자”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A, Hale and J. Turner, “Has Not the Savior Come as the Bridegroom?” Advent Mirror, Jan. 1845). 터너와 해일이 주노선인 ‘신랑’ 견해를 대표했지만, 1844년 이후 몇 년 동안 ‘신랑 또는 닫힌 문’ 재림신자들 사이에는 상당한 견해 차이와 혼란이 있었다. 그렇지만 <에드벤트 미러>의 이런 견해는 1847년까지 그리고 안식일 준수 재림신자가 부상하고 닫힌 문 개념에 대한 새로운 하늘 성소적 관점이 일어날 때까지 지배적인 견해로 남아있었다.

‘신랑’ 재림신자들은 재림, 부활, 새 예루살렘 등이 실재적 사건(장소)이냐 영적인 사건(장소)이냐를 놓고 분열되었다. 결국 대다수가 영적 견해를 채용했다. 1846년 전반까지 영적 견해를 지지하는 자들은 표류하다가 셰이커교(Shakerism)로 흘러 들어가거나 ‘신랑’ 견해를 포기했다. 안식일 준수 재림신자가 된 “적은 무리”(little flock)는 닫힌 문 개념을 믿고 있었지만 영적인 접근은 완전히 배격하고 문자적인 견해를 지지했다. 엘렌 화잇은 ‘신랑’ 개념을 영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을 반대하는 입장의 선두에 서 있었다.

1847-1849년에 안식일 준수 재림신자들은 닫힌 문을 하늘 성소를 두 칸(성소와 지성소)으로 나누는 막에 적용함으로써 그 개념을 재(再)정의했다. 이들은 예수께서 1844년 10월에 하늘 성소의 첫째 칸 문을 닫고 둘째 칸의 문을 여심으로써 새로운 국면의 사업을 시작하셨다는 이해를 갖게 되었다. 요한계시록 11:19을 사용하여 조셉 베이츠는 이 견해를 1847년 1월에 처음으로 소책자로 출판하여 제안했고, 제임스 화잇이 1847년 5월에 그 주제를 계속 주장했다(J. Bates, The Seventh Day Sabbath: A Perpetual Sign From the Beginning to the Entering Into the Gates of the Holy City, According to the Commandment, 2nd ed. [New Bedford, Mass.: Benjamin Lindsey, 1847]; JW, A Word to the “Little Flock” [1847]).

조셉 베이츠는 제임스 화잇 및 엘렌 화잇과 함께 지성소에서 수행되고 있는 예수의 새로운 하늘 성소 봉사를 안식일 및 언약궤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율법(계 11:19)과 연관 지었다. 이런 연관성은 안식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1848년과 1849년에 베이츠는 더 나아가 안식일이 하나님의 인이며, 따라서 144,000인을 모으기 위해 온 세상에 선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Joseph Bates to Leonard and Elvira Hastings, Aug. 7, 1848; idem, A Seal of the Living God: A Hundred Forty-four Thousand of the Servants of God Being Sealed in 1849 [New Bedford, Mass.: Benjamin Lindsey, 1849], 34, 61, 62).

안식일 및 성소 교리가 급속하게 발전됨에 따라 초기에 있었던 “죄인들”에 대한 닫힌 문 개념과 복음 선포를 위한 새로운 필요 사이에 단절이 유발되었다. 안식일 준수 재림신자들은 1849-1852년에 이 단절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 시기 동안 안식일 준수 재림신자들의 복음 전도의 초점은 점차 이전의 밀러주의들에게서 탈피하여 타(他)기독교인들뿐 아니라 세상 전체까지 포함하기에 이르렀다.

“죄인들”이라는 의미는 매우 구체적으로 밤중소리 기별을 거절한 자들에게 적용되었다. 안식일 준수 재림신자들은 재림기별을 그렇게 광범위하게 전파했는데도 1844년 이후 수년 동안 아무도 그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을 경고하는 그들의 사역이 끝났다고 결론지었다. 사실상(신학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죄인”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확대하여 거기에 세상 전체를 포함시켰다. 1850년에 이르러 안식일 준수 재림신자들은 “죄인들”이란 말이 전적으로 세상 전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고, 개인적으로 재림을 거절한 자들만을 가리킨다고 한 <에드벤트 미러>의 원래 견해를 한층 더 구체적으로 재정의했다. 제임스 화잇은 “죄인들” 곧 “구원의 제안을 거절한” 자들이 “예수께서 성소를 떠났을 때 중보자 없이 남겨졌다.”라고 썼다([JW], “The Sanctuary, 2,300 Days, and the Shut Door,” Present Truth, May 1850], 14). 제임스 화잇 등은 호세아 5:6, 7을 사용하여 이런 정서를 표현했다(ibid.; David Arnold, “The Shut Door Explained,” Present Truth, Dec. 1849). 제임스 화잇은 “그들이 주님을 발견하지 못한 이유가 ‘단순히’그들이 그분이 계시지 않은 곳에서 그분을 찾고 그분이 지성소로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위의 책). 앞서 몇 달 전 제임스 화잇은 “재림을 믿지 않고 1845년까진 공적으로 신앙고백을 하지 않았지만 전체 진리에 강한 확신을 갖게 된 한 형제”의  회심에 관해 언급한 적이 있었다. 제임스 화잇은 계속하여, “그는 결코 재림을 반대한 적이 없었고, 따라서 주님께서 그를 인도하고 계셨음이 분명하다.”라고 말했다(JW, “Our Tour East,” Advent Review, Aug. 1859). 1851년에 이르러, 제임스 화잇은 회심할 수 있는 세 부류의 사람(실수한 형제들, 아이들, “숨어 있는 영혼들”)에 관하여 명시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엄밀한 의미에서 회심(conversion)이란 죄에서 거룩함으로의 변화를 나타낸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것이 ‘모든 종류의 회심을 배제하진 않는다.’라고 쉽게 대답한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한 복음’의 기별을 들은 자들과 거절한 자들 또는 그것을 들으려 하지 않는 자들은 거기서 제외된다고 믿고 있다. 우리에게 그런 자들을 위한 기별은 없다. 그들은 우리의 기별을 들을 귀가 없다.”([JW], “Conversions…,” RH, Apr. 7, 1851).

그는 계속하여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귀중한 무수한 영혼들을 간직하고 계시며, 심지어는 교회들 안에도 간직하고 계신다. …예수께서 세상을 위한 그분의 중보를 마쳤을 때 그들은 받은 빛에 따라 살고 있었고, 따라서 그들이…셋째 천사의 기별을 들으면 모든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다.” 얼마간 제임스 화잇은 안식일 준수 재림신자들이 “숨어있는 영혼들” 무리를 위해서는 일할 필요가 없다고 믿었다(위의 책). 그러나 계속하여 “현대진리”를 받아들이는 수가 증가하자 곧 이런 단서는 무너졌다. 그는 다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열린 문에 대해 가르치며, 와서 그것을 들을 귀가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발견하는 자들을 초청한다.”([JW], “Call at the Harbinger Office,” RH, Feb. 17, 1852). 그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현대진리에 들어있는 축복들을 함께 나누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1844년에는 재림신앙과 관련을 맺지 않았다.”([JW], “The Work of the Lord,” RH, May 6, 1852). 뉴욕 주에 있는 “재림신앙의 형제들”의 수가 “스무 명 남짓”에서 “천 명 가까이” 이를 때까지 성장은 증가했다(“A Brief Sketch of the Past,” AR, May 6, 1852).

전에는 제임스 화잇이 예수께서 세상을 위한 그분의 중보 사업을 끝마쳤다고 믿었지만, 1852년 5월에는 예수께서 하늘 성소의 지성소에서 세상을 위해 중보하고 계신다고 썼다. 그는 이렇게 천명했다. “우리는 큰 기쁨으로 시은좌뿐 아니라 하나님의 법궤를 언급하고 있으며, 이 둘 모두 이 시대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시은좌를 좋아하는데, 그 앞에서 자비로운 대제사장께서 이제 그분께 성실과 진심으로 나아오는 자들의 송사를 위해 탄원하고자 대기하고 서 계신다.”([JW], “The Ark and the Mercy Seat,” RH, May 27, 1852). 1852년 제임스 화잇을 비롯한 안식일 준수 재림신자들에게, 예수께서 하늘 지성소의 시은좌 앞에 계셨다는 점에서 사실상 새로운 이해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닫힌 문 견해에 대한 발전적 변화가 종결된 것이다. 안식일 준수 재림신자들은, 모든 죄인이 현대진리라는 배경에서 복음의 기별을 들어야 하며 1844년 밤중소리에 나타난 “진리의 빛을 악한 마음으로 거절했던” 자들만이 구원에서 제외되었음을 분명히 했다. 이런 입장이 안식일 준수 재림신자들의 지속적인 입장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닫힌 문에 대한 엘렌 화잇의 견해는 몇 가지를 제외하고 전반적으로 위에서 기술한 발전된 견해와 조화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초기의 진술들은 그녀가 <에드벤트 미러>와 유사한 관점을 가졌었음을 시사한다. “하나님께서 거절하신 모든 악한 세상”에 관한 첫 번째 계시를 묘사한 것(WLF 14)을 보면 그녀가 적어도 밀러주의자들의 기별을 악하게 거절했던 죄인들을 위한 은혜의 시기는 마쳤다고 믿었던 것 같다. 터너와 해일까지도 신실한 개인은 여전히 구원받을 수 있었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려 했다는 사실을 보면, 엘렌 화잇 역시 모든 인간을 위한 은혜의 시기가 끝났다는 식으로 말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뿐 아니라, 메인 주의 엣킨슨(Atkinson)에서 1845년 2월 동안에 그녀와 대화를 나눈 밀러주의 신자들은 개인들은 회심하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Burt, “Historical Background,” 136, 137).

그렇지만 엘렌 화잇의 견해와 몇몇 닫힌 문 지지자들의 견해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점이 있었다. 조셉 터너와 새뮤얼 스노우(Samuel Snow)는 예수께서 제사장으로서의 그분의 사역을 끝내셨다고 주장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엘렌 화잇의 두 번째 주요 계시는 예수께서 여전히 하늘 성소에서 대제사장으로 봉사하고 있음을 확증했다. 신랑 이상(Bridegroom Vision)이라고도 불리는 1845년 2월 계시에서 그녀는 먼저 아버지를 보고 그런 다음 예수께서 하늘 성소의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신 것을 보았다. 사탄이 성소에 서 있는 것처럼 모조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예수께 시선을 고정시켰던 자들은 그분과 함께 믿음으로 지성소로 들어갔다. 그녀는 이렇게 썼다. “사탄의 목적은 그들을 계속 기만된 상태로 있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꾀어 기만하는 데 있었다.”(초기문집, 56). 사탄이 여전히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녀가 기만당한 자들이 누군지 구체적으로 밝히진 않았지만 그들에게도 여전히 희망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렇게 아주 이른 시기부터 엘렌 화잇은 닫힌 문에 관한 하늘 성소적인 관점뿐 아니라, 명시적이진 않지만 예수를 지성소로 따라 들어간 자들을 위한 열린 문 개념을 제시했다.

엘렌 화잇은 그녀의 남편과 맘을 합하여, 밀러주의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던 자들과도 대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1850년 2월 서신에서 그녀는 이렇게 썼다. “이곳 주변 모든 지역에서 영혼들이 진리를 향해 나아오고 있다. 이들은 재림기별을 듣지 못했고, 이들 중 어떤 이들은 1844년에 신랑을 맞으러 나아갔었지만 그 후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믿는지를 모를 때까지 거짓 목자들에게 속아 왔었다.”(서신, 1850년; 5MR 91). 이와 함께 그녀는 앞서 밤중소리를 거절하고 “구원을 위한 때가 지나갔다.”라고 믿었던 자들 가운데 있었던 가짜 그리스도인 부흥을 묘사했다(ExV 27; ExV 54. 4). 엘렌 화잇은 그녀의 여생 동안 내내 은혜의 시기가 1844년과 관련된 기별을 악하게 거절했던 자들에겐 닫혔다고 믿었다.

1883년에 그녀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1844년에 닫힌 문이 있었음을 계시 중에 보았고, 그 사실을 지금도 믿고 있다. 첫째와 둘째 천사 기별의 빛을 보고도 그 빛을 거절한 자들은 모두 어둠 속에 남겨졌다.”(Ms 4, 1883; 가려 뽑은 기별 제1권, 63). 여러 해 동안 화잇을 비평하는 자들은 닫힌 문에 관한 엘렌 화잇의 입장에 도전했다. 첫 번째 주요 비평은 B. F. 스누크(Snook)와 윌리엄 H. 브린커호프(William H. Brinkerhoff)에 의해 1866년에 출판되었다(참조 Marion Party). 현재에 이르기까지 닫힌 문 개념에 대한 다양한 주장들이 엘렌 화잇의 예언적 은사를 불신하도록 이끄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닫힌 문에 대한 발전적 이해라는 측면에서 몇 가지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엘렌 화잇의 이상들은 시종일관 1844년 10월과 관련된 예언적 기별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동시에 은혜의 시기가 당시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예수께서 여전히 대제사장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확언했다. 또한 그녀는 개인이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하거나 “자비의 문”이 닫혔다고 쓰지도 않았다. 그녀의 진술들을 보면, 아주 짧은 기간 동안이지만 그녀가 세상을 위한 복음전도 사역이 끝났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그녀의 계시들은 신학적으로 더 열린 관점을 보여 준다. 잠시 동안의 이런 이해의 단절은 몇 년 내에 곧 해결되었고, 닫힌 문과 열린 문이라는 용어들은 안식일과 성소 교리를 통합하고 1844년의 경험을 설명할 뿐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한 새로운 복음전도 운동에 대한 이유를 제공해 주는 새로운 신학적 이해를 구체화시켰다.

훗날 제임스 화잇은 닫힌 문에 대한 그들의 일부 이해를 더 서서히 포기해 나감으로써 그들이 얻은 유익에 대해 반추했다. “이 백성 가운데 어떤 이들은 얼마의 시간의 흐른 후 곧 전반적으로 재림신자들과 함께 닫힌 문 개념을 믿었다. 우리 중 어떤 이들은 그들의 재림운동 경험을 버리고 멸망으로 물러난 자들보다 더 오랫동안 이런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 성소로부터 온 빛으로 말미암아 그 문제가 설명될 때까지 그런 입장을 지지한 것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다.”(Life Incidents, 207).
<추가 독서> 가려 뽑은 기별 제1권, 59-64.




-Merlin D. Bu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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