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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 재림 전 심판, 예언의 신에 관한 질문과 답변

13. E. J. 왜거너는 어떻게 빗나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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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 조섭 왜거너(Ellet Joseph Waggoner, 1855-1916년)는 J. H. 왜거너(1820-1889년)의 아들로, 재림교인 의사, 목사, 교사, 편집자, 저술가, 부흥설교가 등으로 일했다. 그는 1888년 미니애폴리스 대총회 회기의 여파로 일어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부흥의 “기별자들” 가운데 하나로 부상한 사람이다. 그의 이름은 늘 그의 동료 목사이자 편집 동역자였던 A. T. 존스와 결부되며, 이 역동적인 2인조는 재림교회 역사에서 “존스와 왜거너”라는 전설적인 인물들이 알려지게 되었다.

E. J. 왜거너는 배틀크리크 대학에서 “고전적인” 교육을 받은 후(1874-1875, 1876-1877년)  앤아버(Ann Arbor)에 있는 미시간 대학교에서 1년간 의학 수련을 받았다(1875-1876년). 그는 1878년에 뉴욕 브루클린의 롱아일랜드 대학 병원에서 의학 학위를 받고 배틀크리크 위생병원의 직원으로 그의 일을 시작했다. 1879년 3월, 그는 제시 프리몬트 모우저(Jessie Fremont Moser)와 결혼했다. 아이오와에서 짧은 기간 목회를 경험한 후 이 부부는 1880년 봄에 북캘리포니아로 이주하여, 시골 건강 요양소(Rural Health Retreat, 성 헬레나 위생병원)에서 봉사하였다. 1883년이 되기 얼마 전 그는 다시 전임 목회로 바꿨다.

그의 삶에서 “전환점”은 1882년 힐즈버그(Healdsburg) 장막부흥회에 참석하던 중 어느 비 오는 날 음울한 오후 집회에서 겪은 놀라운 영적 체험이었다. “홀연히 한 빛줄기가 내 주변을 비쳤고, 장막은 마치 해가 비치는 것처럼 훤하게 밝아진 것 같았다. 나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보았고, 난생 처음으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며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친히 자신을 드리셨다는 사실이 나에게 나타났다.”(McMahon, 20). 왜거너는 그때 거기서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성경적 기별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는 데” 자신의 삶을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1883년 그는 퍼시픽 프레스(태평양 출판사)로 부름을 받아 당시 <싸인즈 오브 더 타임즈> 편집국장이었던 그의 아버지를 돕게 되었다. 1884년 그는 A. T. 존스를 만나 1886년 중반에 존스와 공동 편집자가 되었다. 왜거너는 1891년까지 이 직책을 맡았다.

그의 공적인 활동은 다음과 같이 네 시기로 구분할 있다: 공적으로 부상하기 시작함(1882-1888년), 1888년 미니애폴리스 대총회 회기 및 그 직후의 여파(1888년 말-1892년 초), 영국/유럽에서 보낸 세월(1892년 중반-1903년), 영락(零落)의 세월(1903-1916년).

그가 부상하던 동안에 있었던 주요 발전은 “갈라디아서의 율법”과 관련하여 논란이 되는 그의 해석이 전개된 것 그리고 그가 점차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통회하는 죄인을 의롭다 여기시는 분으로 그리스도를 강조한 것이었다. 그가 배틀크리크에 기반을 굳히고 있던 인물들, 특히 두드러진 인물로 G. I. 버틀러(대총회장)와 유라이어 스미쓰(<리뷰 앤드 헤럴드>의 오랜 편집장)에게 완강한 반대를 받은 후 1888년 미니애폴리스 대총회에서 인화점(引火點)에 도달했다. “갈라디아서의 율법”의 정체에 대한 왜거너의 입장(그 율법이 일차적으로 의식법이 아니라 도덕법이라고 이해함)이 나이든 교회 지도자들과 논쟁을 하게 된 주요 배경이 되었지만, 1888년 대총회 회기에 왜거너가 발표한 주요 강조점은 그리스도 및 그분의 의롭게 여기시는 은혜를 드높인 데 있었다.

왜거너의 이런 강조점에 대한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엘렌 화잇은 개인적으로 그와 존스의 기본적인 신학적 논지를 강하게 지지했다. 존스와 왜거너의 그리스도/은혜 중심적 강조에 대한 거리낌 없는 주장은 1896년까지 지속되었다. 1888년 대총회 직후에 엘렌 화잇은 이 두 부흥설교자(편집자)와 연합하여, 장막 부흥회, 교회와 대학교의 부흥회, 목회자 협의회 등을 두루 다니며 그리스도와 그의 의에 관한 “복된 소식”을 추가적으로 충분히 전하였다. 사실, 존스와 왜거너의 그리스도 중심적 강조는 이미 그보다 전에 엘렌 화잇이 “그리스도의 입혀주신 의”라는 말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에 대해 한결같이 강조해 온 것을 더욱 고취시킨 것에 불과했다.

엘렌 화잇이 호주로 떠난 직후(1891년 말)에 왜거너는 대총회의 부름을 받고 영국과 유럽에서 봉사하게 되었다(1892-1903년). 이 기간에 그의 주된 사역은 영국 선교사 저널 <현대진리(Present Truth)>를 편집하는 것이었다. 왜거너의 개인적인 영향력이 유럽에 집중돼 있었지만, 그는 1895, 1896, 1897, 1898, 1899, 1901, 1903년의 대총회 회의를 위해 귀국하곤 했다. 그는 1903년만 제외하고 모든 회기 동안 성경 연구를 위한 주강사였다.

왜거너가 남긴 신학적 유산 가운데 논란이 되는 이슈는 과연 엘렌 화잇이 그의 신학을 어느 정도 지지했는지에 관한 것이다. 엘렌 화잇이 존스와 왜거너를 지지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녀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및 그것과 관련된 교리들을 정의하기 위해 그들에게 모종의 “경전적인” 권위를 부여했다는 주장은 문제가 있음이 입증되었다. 가장 논란이 된 교리적 이슈는 칭의, 완전, 언약,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죄와 죄인을 다루는 것과 관련된 하나님의 공정성을 위한 마지막 세대 성도의 옹호 등과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기별과 봉사에서 엘렌 화잇의 강한 지지를 얻은 부분은 무엇이었는가?

1888년 미니애폴리스 대총회와 그 직후에 왜거너가 전한 기별의 의의에 대한 그녀의 매우 포괄적인 평가에서 그녀가 강조한 여러 주제가 있다. 그중 두드러진 것은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를 구주(단지 율법을 주신 분으로가 아니라)로 높인 것 (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3) 그리스도의 의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의 연관성 (4) 재림교인들이 예수께 집중해야 할 필요성 (5) 그리스도의 의 또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요한계시록 14:9-12에 기록된 셋째 천사의 기별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 (6) 예수가 그의 자녀들을 위한 “언약적 축복들”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 (7) 재림교인들이 율법은 강조해 왔지만 예수 및 그의 희생을 믿는 믿음의 중요성을 소홀히 여겼다는 것 (8) 하나님께서 존스와 왜거너를 일으키신 것은 재림교인들의 시선을 예수 및 그의 희생과 공로를 믿는 믿음으로 돌리기 위함이라는 것(<목사와 복음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91-93; 참조 Knight, A User-friendly Guide, 21, 22) 등이다.
엘렌 화잇의 해석자들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완전, 그리스도의 인성, 언약, 하나님을 옹호하는 데 있어서 마지막 세대 성도들이 하는 역할 등에 관한 왜거너(존스)의 견해에 그녀가 어느 정도 동의했는지를 놓고 계속 논쟁하고 있다. 왜거너와 엘렌 화잇의 상호작용 및 그로 말미암아 그 후 재림교회 신학이 발전된 것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왜거너의 더 독특한 개념들과 그녀 사이에 있는 일치점과 상이점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계속될 것(또한 교회가 그것들을 포용해야 할 것인지)은 분명하다.

왜거너의 글들에서 분명하게 부각되는 면은 영혼 속에 내재하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을 강조한 점이다. 어떤 이들은 이런 주관적 측면의 강조가 그를 하나님의 내재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데로 몰아갔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이들은 명백하게 드러난 그의 범신론적 정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신자들 안에서 강력하게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그가 적합하게 강조하는 데 단지 지엽적으로 약간의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주장했다. 왜거너의 삶과 글에  대한 좀 더 포괄적이고 지속적인 연구가 이 논란이 되는 이슈를 더 확실하게 밝혀 줄 것이다.

신학적인 이상 징후 및 결혼 관계의 파산의 씨앗이 뿌려진 것은 그가 유럽에 있는 동안이었다. 심지어는 왜거너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도 1896년에 그가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한 것은 범신론적(만유재신론적) 경향을 보인 것임을 인정한다. 더욱이 1901년 대총회 회기 때 그는 “영적 친밀성”(spiritual affinity)에 대한 “새 빛”에 열광하고 있었다. 그 개념의 요지는 자신의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 이 세상에서 그런 “친밀성”을 가질 수 있으며, 그런 다음 하늘에 가서는 그 사람과 결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이 나타나면서, 신학적 쇠퇴, 교단의 직책에서 물러남(1904년), 그의 본부인과의 이혼(1905년), 그 후 에딧 애덤스(Edith Adams)와의 재혼이 이어졌다. 따라서 1903년부터 1916년 그가 죽을 때까지의 기간은 재림교회에 더 이상 새로운 신학적 영향을 끼치지 못한 영락의 기간을 대표했다. 그러므로 1901-1908년의 기간은 왜거너와 엘렌 화잇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세월이었다.

1901년까진 그녀가 왜거너와 그의 저작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Lt 77, 1898; Lt 28, 1900; Ms 81a, 1901). 그러나 1901년 배틀크리크 대총회 회기 후에 그녀는 그의 견해들에 대해 깊이 우려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의 범신론적 경향에 대해 공개적으로 경고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에 대한 공상적인 견해”라고 일컬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17세 때 봉사를 시작하면서 반대하라고 요청받은 “하나님에 대한 오전(誤傳)”과 흡사했다. 1903년 10월 3일에 그녀는 그런 “공상적인 견해”가 결과적으로 “배도, 강신술, 자유연애주의”를 몰고 올 것임을 내비쳤다(Lt 230, 1903; 21MR 172). 3일 후 그녀는 왜거너의 교묘하고 부정(不淨)한 자유연애주의에 직접적으로 맞섰다. 사탄은 “그대를 강신술의 미궁 속으로 빠뜨리고자 한다. 그는 그대의 애정을 그대의 아내로부터 떼내서 다른 여인에게 고착시키고자 한다.”(Lt 231, 1903; TSB 200). 1908년에 엘렌 화잇은 왜거너의 사상들이 “1844년의 시기를 지낸 후 우리가 광신주의 운동들을 보았던 여러 곳에서 그것들을 만나 질타했던 사상들과 성격적으로 유사하다.”라고 거듭하여 말했다. 그런 다음 그녀는 분명하게 말했다. “왜거너 의사는 그때[1901년] 영적인 친밀성에 관하여 그가 주장한 교리로 믿음에서 떠나가고 있었다.”(Lt 224, 1908; 10MR 358).

엘렌 화잇은 1901년과 1903년에 이런 무서운 경고를 하면서도, 계속하여 왜거너의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그녀는 P. T. 메이건(P. T. Magan)과 E. A. 서덜랜드(E. A. Sutherland)에게 편지를 써서, “베리언 스프링스에 있는 학교 [선생]으로 데려와서” “튼튼한 토대 곧 만세의 반석 위에 그의 발을 두도록 도우라.”고 권면했다. 그녀는 “그가 이전의 정결함과 능력을 회복할 것이라.”는 희망을 낙관적으로 표현했다(Lt 214, 1903; SpM 338). 비통하게도, 이런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왜거너의 이런 공상적인 “견해들”은 결국 그를 이혼과 재혼으로 몰아갔을 뿐 아니라, 교단 직책에서 떠나는 일로 이어졌다(1904년). 그의 삶의 마지막 10년 동안 그는 은거해 살았다. 한때 “그리스도의 비길 데 없는 매력”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강력한 “기별자”였던 그가 그의 감화력과 능력을 모두 박탈당한 것이다.




-Woodrow W. Whid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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